한지원의 작업실은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7분, 골목 안쪽 3층 건물의 맨 위층에 있다.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는 것을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는 조금 원망했지만, 문을 연 순간 잊혔다. 층고 3.2미터의 천장, 그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난 콘크리트 골조. 다른 집에서는 흔히 석고보드로 덮어버릴 그 구조를 그녀는 그대로 두었다.
"이사 오고 삼 일째 되는 날, 집주인 허락을 받고 기존 천장을 뜯어냈어요. 그때 본 회색이 너무 좋아서 바로 결심했죠. 이 건물의 원래 얼굴을 존중하기로."
5평에 콘크리트는 답답하지 않을까
많은 사람들이 작은 공간에 회색을 들이는 걸 주저한다. 한지원도 그랬다. 콘크리트의 무게감이 좁은 공간을 더 좁아 보이게 만든다는 걱정.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반대의 결론을 냈다.
"벽지를 깔끔한 흰색으로 하면 공간이 넓어 보인다고들 하는데, 사실 그건 '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' 전략이에요. 저는 이 공간에 성격을 주고 싶었어요. 작지만 또렷한 공간. 회색은 그걸 가능하게 해줬어요."
대신 그녀는 세 가지 원칙을 지켰다. 첫째, 가구의 높이를 낮춘다. 소파 대신 플로어 쿠션, 침대 대신 낮은 매트리스. 천장의 회색이 시야에서 멀어지면서 공간감이 살아난다. 둘째, 조명을 여러 개로 분산한다. 천장등 하나가 아니라 간접등 네 개로 공간을 나눈다. 셋째, 따뜻한 소재를 섞는다. 콘크리트의 차가움을 오크 원목, 리넨, 식물이 상쇄한다.
공간의 세 구역
작업 구역 — 창가 아래 1.5평
빛이 가장 좋은 창가 아래가 작업 데스크다. 철제 다리에 원목 상판을 얹은 책상은 직접 조립했다. 뒤쪽 벽은 원래 구조의 콘크리트 벽. 그 위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.
"벽에 핀으로 그림을 꽂으려면 스크래치가 생겨요.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아요.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흔적이 이 공간을 살아있게 만들거든요."
휴식 구역 — 2평
작은 공간이지만 분명한 분리가 있다. 작업 구역과 휴식 구역 사이에 놓인 것은 오픈형 선반 하나. 책과 식물, 몇 개의 콘크리트 오브제가 자연스럽게 경계를 만든다. 매트리스는 바닥에 직접 놓았고, 위에는 회색 리넨 커버. 베개 옆에는 항상 책 두 권이 놓여있다.
식사·주방 구역 — 1.5평
작은 IH 인덕션과 미니 싱크만 있는 초소형 주방. 하지만 그녀는 요리를 좋아한다. "작은 주방에서 요리하는 건 제약이 아니라 편집의 기회예요. 도구를 최소화하고 동선을 극도로 효율화하게 되죠. 그게 즐거워요."
식탁도 따로 없다. 작업 데스크에 앉아 밥을 먹고, 다시 그 자리에서 일을 한다. "공간이 작으면 하나의 가구가 여러 역할을 하게 돼요. 그게 더 자연스럽다고 느껴요."
콘크리트 공간의 습도 관리
콘크리트는 습기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성질이 있어 자연스럽게 습도 조절 역할을 합니다. 다만 겨울철에는 결로가 생기기 쉬우니 환기를 하루 2~3회 확실히 해주고, 가습기는 70% 이상 설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. 한지원은 식물 여러 개를 두어 자연 가습 효과를 노렸다고 해요.
이 공간에 들인 것들
한지원의 작업실에는 눈에 띄는 '비싼' 가구가 없다. 대신 고민하고 고른 물건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.
- 원목 데스크 — 철제 헤어핀 다리(이케아)에 자작나무 상판을 올려 직접 조립. 총 12만원.
- 플로어 램프 — 무인양품의 종이 갓 스탠드. 회색 공간에 부드러운 황색 빛을 더한다.
- 오크 우드 의자 — 당근마켓에서 구한 빈티지. 좌판을 리넨으로 직접 갈아씌웠다.
- 콘크리트 화분 시리즈 — 본인이 DIY로 만든 것들. 크기가 세 가지라 균형감이 산다.
- 유리 수반 — 한일 도자기 장인의 작품. 유일하게 '사치'라고 부를 만한 물건.
1년이 지나고 나서
이사 온 지 1년 반. 후회하는 선택은 없냐는 질문에 그녀는 잠깐 생각하고 답했다.
"처음엔 회색이 내 기분까지 가라앉히지 않을까 걱정했어요.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어요. 이 공간이 저를 차분하게 받쳐주는 느낌이에요. 작업이 막힐 때 벽을 바라보면, 저 벽은 수십 년 동안 여기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요.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돼요."
우리가 인터뷰를 마치고 나갈 때, 한지원은 현관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. 신발장도 없는 좁은 현관. 콘크리트 바닥과 철제 우산꽂이. "이 장면이 제일 좋아요. 집에 들어올 때마다, '아, 다시 여기로 돌아왔구나'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."